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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독서법

정현 / 비평가, 인하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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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 on Timing _ Timing belt, Motor, Steel, Collected Words _ Variable Installation _ 2022

Solo Show _ A Blank Confession, Artist Residency TEMI, Daejeon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뭐든지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세상인데 우린 행복하지 않아요. 뭔가가 빠져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그동안에 사라진 거라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가 불태워 없앤 책들,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1920-2012), 『화씨 451』(Fahrenheit 451), 황금가지, 2009(1953), 135

   들어가기

   『화씨 451』은 2049년이라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책의 소유와 독서가 금지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몬태그(Guy Montag)는 책을 태우는 업무를 맡은 방화수(the fireman)이지만 우연히 책의 가치를 자각한 후 독서를 통한 사유가 허락된 세계를 되찾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방화수들을 저격한다. 결국 이 미지의 도시는 폭격에 의해 잿더미가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책을 잘 못 사용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말자고 약속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극중 몬태그의 상사로 등장한 비티(Beaty)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엄청난 규모의 서재를 소유한 모순적 인물이다. 그가 말하길, 문제는 책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과연 책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책은 글을 담은 그릇일 뿐일까? 책을 소유하는 것과 그것을 읽는 것은 서로 다른 가치로 분리되는가? 소설은 책의 소유와 독서라는 실천 사이의 간극을 통하여 읽는다는 행위와 이로 인하여 비롯된 전복적 행위를 독서의 효과, 나아가 다시 쓰는 행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치 판단의 양가성은 또한 김원진의 작업과 중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책의 유동성

   김원진에게 책은 하나의 상징과 유사하게 작용한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유독 기록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자신의 기억과 글 사이가 벌어져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기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으나, 여하튼 어린 김원진은 혹독하게 단일체가 되어야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기록과 기억 사이의 오차를 숨기기 위해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냉철한 시선으로 자신을 질타하고, 과거를 빠르게 폐기해야한다는 일종의 집착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나는 과거를 서랍에서 꺼내고, 그 페이지를 산화시켜 빠르게 늙게 하여 죽음을 향하는 시간의 가치에 태웠다.” (각주1) 이 경험은 현재의 작업을 끌어낸 단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심리적 갈등을 미학적으로 본다면, 행위와 결과 사이의 오차를 줄이려는 행동은 지성과 감각 사이의 (선험적인) 위계를 떠올리게 한다. 즉 인식이란 직간접적인 경험을 토대로 어떤 공통 감각과 연결되어야만 이른바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를 했다는 믿음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 감각들을 억지로 외면해야만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을 가질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만약 지성이 정해진 규율을 따르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감각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느낌/정서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기술한다면 시차를 두고 다시 읽더라고 과거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라 상상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불안과는 달리 이는 매우 바람직한 독서의 방식 중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균열 없이 이어질 수는 없다. ‘책의 해체’를 주제로 한  초기작들은 사회문화적으로 책을 대하는 관습적 태도를 전복하려는 실험의 과정으로 보인다. 자신이 읽은 책의 페이지들을 뜯어낸 뒤 한 장씩 오린 후 다시 쌓아 올림으로써 책은 침묵의 질료가 된다. 수많은 생각과 글들로 채워진 책의 가치가 소멸하고 그 대신 종이의 물성과 부피로 인해 감각적인 존재로 변신한다(Twisted Moment #0, 2011). 김원진에게 독서란 일반적인 책읽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책을 태우고 그 향을 입히고 흩어진 부산물들을 모아 읽던 책갈피 사이에 꽂아 넣는 행위들이야말로 그만의 독서법이다. 여기서 책은 자신의 독서를 증명하는 물질이라기보다 오히려 한 차원 멀어져서 하루라는 시간을 상기시키는 물질이 되기도 한다. (Flow_수집한 책, 2014). “오늘의 연대기”(2016-2018)는 폐기된 책을 쌓아 놓고 책의 가운데를 파내어 구멍을 만든 뒤 여기에 석고를 넣어 제작한 작업으로 소멸을 앞둔 책의 운명을 추상적인 탑의 형태로 기념한다. 전리물이나 기념비가 되기엔 (공공적/행적적으로) 쓰임새를 다한 익명의 책-기념비는 공동체의 부재로 인해 생성된 수많은 ‘비인칭들’(impersonals)과 꼭 닮아있다. 

 

   독서란 읽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책을 만지고 뒤집고 태우고 속을 비우고 사라진 부분을 메꾸고, 불로 태워 가루를 낸 뒤 석고를 섞어 질량과 부피를 만들어주는 등의 과정과 행위는 글, 문학,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작가에게 독서라는 행위는 책의 크기, 무게, 질감, 냄새와 같은 현상학적인 체험의 과정에 더 가깝다. 과연 독서가 글을 읽고 문해력을 키워 세상이 원하는 정답을 발견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일까? 문학교수이자 정신분석가인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1954)는 독서에 대한 상식을 따르지 말라고 권한다. 그는 책에 대해 말하려면 책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즉 책을 ‘유동적인 오브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는 다양한 기제에 의하여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그것은 오브제로서의 책은 물론이고 책의 내용 역시 가변적이기에 누구나 이 유동성을 이용하여 “읽지 않은 책의 창작자” (각주2) 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읽지 않음’이란 다른 방식의 읽기가 아니겠는가.  다르게 읽기란 또한 다르게 쓰기를 허락한다. 이렇게 읽기와 쓰기가 등가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책을 불로 태워 그을음을 입히는 과정이야말로 동시에 읽기와 쓰기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중첩된 읽기와 쓰기

   작가에게 책은 이른바 관계의 매개체와 다름없다. 버려지는 책들은 도시재개발로 인해 고향의 상실로 빗대어도 될 것이다.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책들을 자신이 집으로 들여와 원래의 형태에 변형을 가는 연금술의 개입은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주어진 문법을 거스르고 새로운 관계, 장소, 환경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찾는 전유의 과정이라 부를 수 있겠다. 전시 <공백, 고백>(2022)은 팬데믹에 의한 긴 공백의 시간을 지탱한 후에 열린 개인전이다. 예외 없이 코로나 19는 작가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을 살아가는 이웃, 주민, 시민과의 만남이 이뤄진 것도 비대면 사회의 한계를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을 터다. 그의 초기작들은 본인을 타자로, 버림받은 책들을 타자의 고향으로 여길 정도로 스스로의 담을 쌓았던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소모했다. 미술사적 관점으로 본다면 자기 참조적인 모더니스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 사회참여적인 태도로의 전환은 그간 다양한 이유로 인해 자기 정체를 드러낼 수 없거나 소거당한 존재들을 모호한 시적 존재로 제시될 수 없었는데, 비로소 이 이성-중심에서 벗어나자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형상들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다.

 

   “공백, 고백”(2022)은 입주작가로 활동 중인 대전의 구도심 재개발사업지역 속한 목척시장, 목척길 지역을 기록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여전히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포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개발로 인하여 사라진 마을의 모습은 지역과 상관없이 그저 폐허일 뿐이다. 마을은 인간, 자연, 문명, 문화, 사물, 기억 등과 공존할 때 생명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존의 생태계가 파괴되면 사물도 표정을 잃고 결국 비인칭의 존재로 둔갑한다. 김원진은 그곳에서 표정을 잃은 파편들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여전히 버려진 땅에서 떠나지 못 한 사람들의 흔적들을 기록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기록할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폐허가 된 숭고한 경관일까?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 땅에 대한 애착, 도시화를 향한 분노를 어떻게 아카이브할 수 있을까? 실제로 소란이나 저항이 크지 않다면 지역의 아카이브는 형식적인 기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파사주 프로젝트를 통해 기념비가 아닌 일상의 사물들을 아카이브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대도시 환경과 개인적인 기억, 집합적 역사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려는 역사적인 분석과 글쓰기의 귀감” (각주3) 으로 오늘날까지 평가받는다.

 

   한편 김원진은 목척교 주변에서 골목에서 대문 앞에 놓인 의자를 주목한다. 남은 주민들이 아침이면 의자를 내놓고 붕괴한 삶에서도 뭔가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작가는 지역을 배회하면서 그들의 말과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뱉지 못 한 말들은 서서히 의식의 저층으로 가라앉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작업 “공백, 고백”은 자동차 부품인 타이밍벨트를 이용해 전시장 3면을 따라 타이밍벨트가 설치되었고 목척교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발췌한 내용 중 일부 문장들은 스텐실을 이용하여 검은 벨트 위에 착색된다. 벨트의 운동 방향에 따라 텍스트는 정/역방향으로 회전한다. 회전이 거듭될수록 검정 벨트 위의 텍스트는 조용히 박락되어 소거된다. 타이밍벨트의 기계음이 사라진 마을, 침묵의 목소리를 대신할 뿐이다. 작가는 감히 그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도 없고, 반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텍스트는 항상 모호한 상태로 드러난다. 그것을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항시 부유한다. 예컨대 목척교 지역에서 기록한 사진들은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목척교 탐방이 읽기라면, 그곳에서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쓰기’라 부르도록 하자. 김원진의 읽기와 쓰기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독서의 진정한 가치는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이 아니다. 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소설이 좋은 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맥락이 자주 끊기거나, 또는 하나의 페이지에 머물면서 기억의 무질서 사이를 배회함으로써 독서의 쾌감은 배가 된다. 왜냐하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시공간으로의 접속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무엇을 이용하여 다른 차원과 접속할 수 있다는 확언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읽는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될 것이다. 공공적 성격의 참여적 작업의 경우에는 작가 이전에 지역의 당사자가 스스로 읽고 쓰는 저자-되기의 조력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는 시인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가 독자를 ‘조작자’라 불렀다고 밝히면서, “읽는다는 것은 시와 마찬가지로 ‘조작’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제거’” (각주4) 라고 전한다. 즉 읽는 행위 자체가 곧 원저자를 지우고 시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행위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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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진은 지난 10여 년 동안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축조하고 있다. 그는 사유와 그것의 흔적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지우기 시작한다. 주로 버려지거나 독서가 끝난, 그러니까 생애주기에 도달한 책 속의 문장을 뭉개고 바스러트림으로써 책이 표상하는 이성과 지식을 해체한다. 여기서 책은 문학이 아닌 하찮은 사물 또는 효용성이 사라진 물질일 뿐이다. 작가는 이처럼 버림받은 책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비인칭’의 존재를 호출한다. 그렇게 버려지고 읽힌 책들은 익명의 연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때로는 방법론이 실제 작업을 압도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방법론이 워낙 견고하다보니 그 바깥을 허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라고 추측해 본다. 최근 들어 뭉개어진 문장들 틈새에서 조금씩 작가의 목소리/촉감이 들리기/느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무엇보다 반가운 마음이다. 

각주

1) 작가의 글에서 발췌

2)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여름언덕, 2008, 198쪽

3)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122쪽

4)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그린비, 2011,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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