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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무용

- 인간실존의 비극성, 연민, 예술

허경 / 철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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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es  _ Installation View (Solo Show _ Kumho Museum of Art, Seoul) _ 2023

   1. 무용, 쓸모없음, 처연함

 

   2023년 ‘금호영아티스트’로 선정된 김원진의 전시명은 <무용(無用)한 무용(舞踊)>이다. 쓸모없는 춤, 무엇이? 인간의 모든 몸짓이. 김원진의 전시를 본 사람은 누구나 동의하듯이, 김원진의 작업은 매우 노동집약적이다. 자신, 그리고 나아가 인간이 수행하는 (먹고 살기 위한 그리고 또 무엇을 위한) 모든 노동 일반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은 바로 이것이다. 쓸모없다. 왜 쓸모없는가? 김원진은 인간실존 일반의 (거의 모든) 행위가 ‘무용’하다는 근거를 그것이 작가에게 처연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 처연(凄然)함. 이때의 ‘처’(凄)는 ‘쓸쓸하다, 외롭다, 서글프다, 춥다, 차갑다’를 의미하는 동시에, ‘서글프다, 구슬프다, 애달프다’ 등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진 ‘처’(悽)와도 혼용된다. 김원진은 인간실존의 일반적 조건 중 하나를 분명 쓸쓸함, 서글픔의 정서라 본다(물론 이런 정서가 다는 아니다). 작가 김원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놓치거나 빼먹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작가의 - 너무도 당연하여 굳이 드러내지도 잘 드러나지도 않는 - 정서(情緖), 곧 처연함, 쓸쓸함이다. 나의 노동을 비롯하여, 인간의 행위는 대부분 무용하며, 그것은 내게 처연함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가, 인간이, 노동하는 모습이 무용하게, 그리하여 처연하게 느껴진다.

 

   2. 피루엣

 

   김원진은 자신의 작업, 인간실존의 노동이 피루엣(pirouette), 춤추는 몸짓을 생각나게 했다고 말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한 작품의 제명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피루엣은 발레 동작의 하나로, ‘한 발로 딛고 서서 두 팔을 올리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무용수의 동작’을 뜻한다. 김원진에게 피루엣은 무용한 무용(useless dancing)을 상징한다. 이 춤은 쓸모가 없다. 이는 우리에게 사르트르가 1943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L'Être et le néant.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 1936)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무용한 정열이다(l'homme est une passion inutile).” 인간은 사물도 신도 아니고, 인간의 본질과 목적을 정해줄 신도 없으므로, 인간은 그저 하나의 ‘쓸모없는 정열’이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다만 쓸모없을 뿐이다.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다른 무신론적 방식으로, 사르트르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그리스도교의 결론에 도달한다. 참으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피루엣은 김원진에게 바로 이러한 무용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무용한 몸짓은 다른 어떤 몸짓이 아닌, 춤, 곧 무용이라는 모습을 갖는다. 피루엣, pirouette이라는 프랑스어는 ‘고정시키다’를 의미하는 골-로만어 어근 pir-에 작은 것을 의미하는 접미사 -ette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한 지점에 고정되어 (목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돌아가는 사람, 인형 또는 물건’을 의미하여, 때로 ‘팽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팽이 혹은 피루엣 동작을 수행하는 무용수는 김원진이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상징이다. 핵심은 이러한 행위에 목적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팽이 혹은 피루엣 무용수는 한 지점에 고정되어 그저 제 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러니, 팽이 혹은 피루엣의 운동은 - 그것들이 상징하는 나의, 인간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 쓸모가 없다, 무용하다.

 

   3. 연민

 

   피루엣 동작을 반복하는 인형 혹은 무용수는 내게 처연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물론 김원진에게 인간실존과 세계의 비극성 자체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제, 마치 시시포스처럼, 이런 비극적인 피루엣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무용수는 내게 곧바로 연민(憐憫/憐愍, pity, pitié, pietà), 곧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가, 인간이, 불쌍하고 가련하다.

 

   4. 레이어들의 변형

 

   그런데 나는, 사람은, 이를 때로는 드러내지만, 보통은 숨기고 가린다. 때로, 나는, 사람은, 스스로 그런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드러내려 해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있듯이, 숨기려 해도 드러나는 것이 있다. 이 드러냄과 숨김, 또는 드러남과 숨겨짐의 놀이는 김원진에게 안과 밖, 속과 겉, 이야기되지 않은 것과 이야기된 것, 선택되지 않은 것과 선택된 것, 옆으로 삐져나온 것과 가지런한 것, 혹은 무용함과 유용함 사이 등등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놀이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김원진이 그렇다고 해서 둘 중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 하나를 높이 찬양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원진은 이 둘 사이의 놀이에 천착한다. 드러나지 않은 것 없이 드러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안 없이 밖이 있을 수 있을까? 삐져나온 것 없이 가지런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김원진은 끊임없이 이 ‘사이의 놀이’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김원진은 오브제와 색채를 가로지르는 레이어들의 변형이라는 놀이, 곧 안의 것을 밖으로, 위로 놓인 것을 아래로, 나란한 것을 곁으로 놓으며, 다양한 층위의 레이어들을 뒤집고 겹치고 뒤섞어, 그러나 언제나 그 결을 따라, 늘 새로운 층위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는 김원진이 사람들이 때로 ‘함부로’ 뒤섞으며 혼동하는 이 세계의 다양한 층위들 모두를, 그 결대로, 존중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날로그적 손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김원진의 노동집약적 작업은 바로 이런 인간실존과 세계의 다양한 층위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섬세한 손길, 눈길에서 나온 것이다. 김원진의 세계에는 ‘하나의’ 결정적ㆍ최종적 층위란 없고, 오직 이런 레이어들의 변형, 곧 여러 층위, 레이어들을 서로 겹치며 뒤섞고 함께 놓아봄으로써,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층위를 창조하려는 의지와 그 과정이자 결과물로서의 ‘다층적인’ 예술(들)만이 존재한다.

 

   5. 심미적 방법론의 존재론적 근거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위에서 언급한 뒤집기, 뒤섞기, 겹치기 등을 포함하는 레이어들의 변형은 이런 의도를 효과적으로 실현시키는 김원진의 심미적 기법들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은, 비단 김원진이 작업하는 색채와 오브제의 물성 차원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기억에 대해서도 여실히 해당된다. 레이어들의 변형이라는 김원진의 기법은 - 그동안 작업에서 사용해온 캔버스, 종이, 밀납, 철, 또 혹은 벨트와 쇠로 된 오브제를 막론하고 - 기본적으로 세계의 존재론적 특성, 그리고 이에 기반한 인식론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과 정신을 막론하고, 세계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인식되는 것과 인식되지 않는 것,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 등 무한한 이항(二項) 대립 작용에 의해서만 인식되거나 인식되지 않는다. 2항, 아무것들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이 아닌, 주어진 2개의 특정 항들 사이에서만 펼쳐지고 접히는 이러한 존재와 인식의 특성은 가령 들뢰즈의 존재론과 매우 닮아있다. 이 펼쳐짐과 접힘은 오직 동시적-상관적으로만 발생한다. 가령, 김원진의 주제인 ‘기억’을 예로 든다면, 주체는 자신의 안쪽이라 해야 할 ‘기억된 것’의 바깥, 곧 ‘기억되지 않은/못한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안쪽이 바깥쪽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가정하고 요청하듯이, 주체는 타자성의 존재를 불가피하게 가정하며 요청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에 기대어서만 태어나고 죽는 존재들, 곧 쌍둥이들이다. 들뢰즈는 이를 현실성과 잠재성의 대립으로 풀었다. 들뢰즈가 이를 - 소쉬르와 라캉을 따라 - 실현된 현실성과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아닌, 동시적ㆍ상관적으로 실현되는 쌍둥이들, 곧 현실성과 잠재성으로 푼 것은 매우 적절한 구분이다. 어떤 것 또는 어떤 일이 실제로 실현되었을 때, 이른바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머지 경우의 수 역시 잠재성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내가 현실에서 이 기차를 ‘탔을’ 때, 내가 저 기차를 ‘타지 않은’ 경우의 수는 동시에 잠재성의 형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6. 한계를 조건 삼아, 심미적 전략

 

   이러한 논의를 이해하는 것은 김원진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김원진은 늘 기억된 것과 기억되지 않은 것을 함께 감싸 안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김원진은 가령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란 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 등에 의해 함께 구성되는 것임에 유의한다. 이는 단적으로 김원진 작업의 언어철학적 차원이다. 언어철학이란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의 기능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의 통칭이다. 김원진은 인간의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에 주목한다. 잘 표현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본래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말할 수 없는 매개체이다. 언어는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향할 수도 있다. 사실, 시각 이미지로 작업하는 이들은 사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아서 말의 세계를 버리고 이미지의 세계로 옮겨온 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결코 이미지로 작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말을 버리고 이미지로 작업한다는 것 역시 동일한 난관에 부딪힌다. 이미지의 세계 역시 말의 세계처럼 일련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호계(界, système)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원진은 말의 층위에서만큼이나 이미지의 층위에서도 레이어들의 변형이라는 기법을 충실히 진지하게 수행한다. 사실 김원진은 ‘(언어든 이미지든) 하나의 기호가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사실을 늘 매우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신비주의가 아니라면)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무한은 전체이므로, 이미지와 언어를 막론하고, 어떤 기호로도 표현될 수 없다. 표현된 것은 오직 유한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표현된 것은 오직 표현되지 않은 것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이는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는 것’ 사이의 고통스러운 괴리를 인식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이다. 어떻게 노력해도 본래 불가능한 것이라면, 불가능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이 돌파 불가능한 한계를 차라리 하나의 조건으로 삼아 작업을 해보자. 한계를 조건 삼아, 라는 이러한 인식은 이제 하나의 전략이 된다. 이 전략은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의 놀이라는 심미적 전략이다. 이로부터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기억된 것과 기억되지 않은 것 등등 무한한 계열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이러한 계열들 각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 자신만의 고유한 맥락, 리듬, 계열을 갖는 - 자신만의 고유한 지층, 레이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원진의 작업 대상은 바로 이 레이어들(layers), 또는 지층들(strata)이다.

 

   7. 기억의 고고학자

 

   따라서 김원진은 스스로를 ‘기억을 담는 도서관의 사서’(librarian)라고 부른다. 나는 김원진을 ‘기억의 고고학자’(archeologist of memories)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마치 유물의 고고학자처럼, 김원진은 기억의 다양한 층위들을 함부로 뒤섞지 않고 조심스럽게 발굴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지층 각각을 존중하며 조심히 작업하지 않고, 그것을 마구 뒤섞어 발굴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발굴이 아니라 ‘파괴’라 불려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김원진은 ‘기억되는 것이 기억되지 않은 것에 의해서만 의미화된다’는 점을 늘 기억하기 때문에, 늘 기억의 결(layers)을 따라 움직이며 섬세히 작업한다. 기억과 인식의 레이어들을 변형시키되, 늘 그 결, 층위를 존중하며. 마찬가지로, 얼핏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김원진이 오류(誤謬)에 천착하는 이유 역시 이런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오류(erreur)란, 조르주 캉길렘의 말대로, 진화를 가능케 한 결정적 조건이다. 이른바 빅뱅 이후, 혹은 보다 좁혀, 생명의 탄생 이후, 이 세계의 결, 그 염기서열구조(DNA)가 변형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면, 나도 당신도 존재하지 않고, 이 글은 쓰이지도 읽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돌연변이(mutations)란, 다름 아닌 레이어 변형작용(transformation of layers) 자체인 동시에, 그 결과이다. 김원진이 오류에 천착하는 이유는 차라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오류가 없는 정답의 세계가 아니라, 오류를 통해 늘 변형되는 세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원진의 세계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 실은 (불가피하게) 열릴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주어진 하나의 특정 계열, 곧 특정 세계에는 정답과 오류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계열들, 세계들 사이의 옳고 그름이라는 구분은 불가피하게 자의적이다. 김원진이 걸어가는 레이어들의 변형이라는 과정철학적, 생성적, 세계는 이처럼 (어느 특정 세계가 아닌) 여러 세계들을 가로지르는 논리를 추구하므로, 불가피하게 불확정적이다. 불가피하게 열린다. 김원진의 세계는 고정된 닫힌 논리의 세계가 아닌, 늘 열려 있어 변화하는 심미적 세계이다. 김원진의 세계 안에서, 기억의 고고학은 - 노드롭 프라이가 말하는 - 하나의 새로운 심미적 연속체(undifferentiated aesthetic continuum)로 다시 태어난다.

 

   8. 다시, 피루엣

 

   피루엣의 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제 자리를 뱅뱅 도는, 쓸모없는, 무용한 무용. 나는 작품 <피루엣>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프랑스어에서 피루엣은 그 자체로 ‘팽이’를 뜻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피루엣 또는 팽이는 특별한 의미 없이 고정된 지점을 뱅뱅 돈다. 그러나 어떤 무용수가 피루엣 동작을 하기 위해서는, 혹은 하나의 팽이가 돌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이든 무엇이든, 하나의 고정된 지점을 선택해야 한다. 고정된 지점 없는 회전은 불가능하다. 고정점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정점은 회전의 중심축이다. 피루엣의 ‘고정점’에서 나는 라캉의 고정점(固定點, point de capiton)을 떠올린다. 라캉이 말하는 고정점이란 (필연성을 담보하는 철학적 고유명사로서의) ‘보편성’을 대치하기 위해 라캉이 제안한 용어이다. 라캉은 말한다. 보편성이 알고 보니, 고정점이었다. 회전의 중심축은 알고 보니, 고정점이었다. 라캉의 이러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앞서 말한 인간실존의 무의미성, 무용한 정열에 대해 생각해보자. 무용한 정열로도 즐겁게 잘 살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다. 따라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나 의미가 있을 수 없으므로 당신이 그것을 창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영어권의 (철학적) 농담 중 하나인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바로 사르트르의 철학을, 통속적이지만, 쉽게 잘 설명해준다. 당신의 인생은 두 가지 불변의 상수, 곧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무한한 선택들(Choices)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라캉은 이와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인간이 ‘필연적’이라고 믿었던 삶의 ‘보편적’ 의미들이 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고안해낸 그저 또 하나의 ‘고정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란 없다. 모든 것이 대등하다. 이것을 선택해도 되고 저것을 선택해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사실은 사르트르라면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므로 둘은 결국 ‘같은 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피루엣 동작을 하고 있는 김원진의 무용수 역시,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고정점을 필요로 한다.

 

   9. 고정점으로서의 예술

 

   김원진의 고정점은 예술로 보인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피루엣 운동을 하는 무용수들이다. 우리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곧 죽어 없어질 것을 위해, 한없이 노력한다. 그 모습이 처연하다. 안쓰럽고 안됐다. 그런 우리 자신의 모습, 너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에, 우리는 한없이 냉정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동정심을, 공감을, 연민(compassion, 같이 느낌)을 품을 수도 있다. 이 연민이 어느 날 연대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처연한 것들을 향한 연민, 연대. 이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것들을 향한 연대와 연민은 ‘크게 사랑하고 크게 슬퍼하는’ 마음(大慈大悲)을 닮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김원진이 자신과 타인과 이 세계에 대해 처연함을 느끼는 것은 김원진이 이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 영원히 회전하는 피루엣 동작을 하고 있는 무용수는 쓸모없는 인간실존 그 자체의 상징이다. 무용수가 열심히 돌고 있는 그 피루엣 동작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의 춤이다. 피루엣을 돌고 있는 무용수의 무용은 처연함을 불러 일으키는 만큼이나, 아름답다. 김원진에게 춤이란 실용적인 것을 넘어서는 심미적 가치, 곧 아름다움이다. 물론 이때의 아름다움이란 협소한 의미의 아름다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은 것, 가령 추함마저도 감싸 안는 그러한 아름다움, 곧 인간과 세계를 심미적 관점으로 바라보겠다는 태도를 지칭한다.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김원진은 삶의 의미를 세계를 심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 곧 예술에서 찾는다. 모든 것이 쓸모없다. 인생도 예술도, 모든 것이 무용한 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몸짓을, 아주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모두, 무용으로, 춤으로, 만들 수 있다.

 

   무용한 무용은 무용하나, 아름답다. 아니, 무용한 무용은 무용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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